잡담

잡담...

下學上達 2012. 1. 3. 06:04
인터넷과 각종 연말 시상식에서 '뿌리 깊은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워낙 많길래, 대체 어떤 드라마인가 해서 몇 편을 보는 중이다. 대부분의 사극이 다 재미있지만, 특히 정치적 문제를 다룬 사극은 더욱 재미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이 꿈꿨던 국가상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져서 흥미로웠다.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조선의 역사는 정도전의 바람대로 왕권과 신권 사이의 조화와 견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흘러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나는 동양 철학, 동양 사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심도있게 공부했거나 한 건 아니지만, 뭔가 동양적인 사고 방식이나 세계관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것이 21세기 우리 사회를 지탱해줄 좋은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보통 동양적인 것에 대해 갖는 편견은 대부분 조선 말기나 일제 시대를 거치며 왜곡된 모습에 기반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만큼 우리가 동양적인 사상이나 세계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 입시를 위해 제2외국어 공부를 해야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불어를 배웠는데, 1-2학년때 불어 공부의 흐름을 놓친 학생들을 위해 2학년 2학기부터 한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나도 불어를 그리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문을 선택했다. 당시 한문 선생님이 비교적 젊고 재미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불어보다는 훨씬 재미있게 한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물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공부해야 했지만, 그 때 배워놓았던 한문은 이후 동양 고전 원문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갖는 동양적인 것에 대한 선호는 그 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좌충우돌 대학 생활을 하며 잊어버렸던 동양적인 것에 대한 선호는,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다시 되돌아왔다. 대학원에서 내가 공부했던,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분야는 소위 '뉴미디어'에 관한 것이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 트렌드만 뒤쫓다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 뭔가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그 영향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키려 노력했었고, 그 과정에서 마샬 맥루한과 해럴드 이니스라는 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내 석사학위 논문은 해럴드 이니스와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놀라움은 마샬 맥루한 때가 더 컸다.

전자 매체의 출현과 그 영향에 관한 맥루한의 통찰은 상당 부분이 동양적인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위-아래, 중심-주변의 분리가 아닌 조화롭고 동등한 상호작용, 직선적이고 선형적인 세계관이 아닌 장(場)의 세계관, 일방적인 전달과 통보가 아닌 대화와 상호 이해의 방식 등은 명백히 동양적인 세계관의 발로였다. 나는 당대 서구인들이 그의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이유가 독특한 그의 글쓰기 스타일 뿐 아니라 이런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어쨌든 석사 과정의 많은 부분을 마샬 맥루한(그리고 해럴드 이니스)과 함께 보내면서 참 즐겁게 공부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약간의 학문적 방황기를 보낸 후, '복잡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왜 복잡계에 대해 처음 알자마자 그렇게 열광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복잡계적 세계관에 내재하고 있는 동양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은 공부하는 도중에 있어 자세한 설명을 할 능력은 없지만, 몇몇 서구 학자들이 불교의 이론을 차용하여 복잡계의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기회가 닿으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들어가보고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내가 공부해오고 있는 과정에서 동양적인 세계관은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모음을 만드는데 우주의 이치를 담으려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글의 우수성이야 뭐 더 말할 필요가 없을테고, 보편적인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연결하려는 사고 방식 자체는 참으로 놀랍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잃지 않는 것이, 이후 내 공부를 더 발전시켜 나가는 핵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아무튼 재미있는 드라마이다.